문춘자 부회장은 재일동포 2세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이다. 그녀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일본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동경한국학교 이사로도 재직 중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일본 사회에서 겪은 수 많은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 문 부회장은 1954년 동경한국학교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첫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로 배우고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이 매우 소중했다고 말했다. 신주쿠구 와카마츠쵸에 민단본부 건물 바로 윗 층에 위치한 학교는 매우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학생들은 그곳에서 서로 도우며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그녀는 “당시 학교는 풀이 많아 오후에 학생들이 직접 풀을 뽑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비 오는 날의 추억 특히 도쿄의 오래된 지역에서 자란 문 부회장은 어릴 때 비 오는 날이 되면 집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고 한다. “비만 오면 타다미(일본식 바닥 매트)가 다 젖었어요. 아버지는 항상 비 온 다음 날이면 타다미를 꺼내 말렸죠. 비가 많이오면 하수구가 넘쳐 길이 물에 잠기곤 했어요. 지금이야 도쿄가 정비되어 깨끗하지만, 당시엔 참 어려운 환경이었죠.” 문 부회장은 도쿄돔 근처에 살면서도 예전의 도쿄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다고 한다. “지금은 중심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도쿄돔 근처가 습지였어요. 비만 오면 이곳저곳 물이 차고 다니기가 어려웠죠.” 학교와 커뮤니티의 변화 문춘자 부회장은 동경한국학교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학교 앞에 풀이 무성했고, 학교 건물도 낡은 목재로 지어져 있어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러나 우리에겐 그곳이 너무나 소중했죠. 한국어로 수업을 듣고, 한국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으니까요.” 문 부회장은 학생 수가 적어 동급생이 17명 남짓 밖에 없었다며, “5명의 여학생과 12명의 남학생이 전부였어요.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 굳건히 의지하며 공부했습니다. 특히 3년 동안 함께 하다 보니 우정이 깊었죠. 부인회, 민단에서 하는 815 회고의 밤 행사 때 저희들이 가서 연극도 하고 그랬어요.” 그녀는 한국학교와 조선학교 학생들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당시 조선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일본 학생들과의 충돌도 자주 있었고, 일본에 져서는 안된다는 마음들이 있어서인지 싸움이 커져 신문에 자주 나오기도 했어요. 그로 인해 재일동포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가정과 사업, 그리고 ‘미나리‘ 결혼 후 문 부회장은 네 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