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여름, 길거리를 스치는 바람은 뜨겁지만 일본 여성들의 옷차림은 의외로 길다. 40대쯤 되면 반바지는커녕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스커트나 헐렁한 바지만이 거리 풍경이 된다. ‘보기 드문’ 정도가 아니라 ‘전무(全無)’에 가까워서, 나 역시 동료 집단의 암묵적 규범에 갇혀 반바지를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다.
사실 반바지는 매해 샀다. 옷장 속에는 ‘언젠가’의 계절을 기다리다 끝내 빛을 보지 못한 반바지가 쌓였다. 지난번 홍콩 여행을 앞두고는 “이번엔 꼭!”을 외쳤지만, 뜻밖의 한파에 다시 긴 바지를 꺼내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었다. 망설임 끝에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자 즉시 다리를 스치는 바람이 전했다. 시원함보다 강렬했던 건 해방감이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았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그야말로 ‘별것 아닌’ 문제였는데도 나는 왜 이렇게 오래 망설였을까. 사람들은 내 다리를 쳐다보지도, 재단하지도 않았다. 모든 두려움이 내 안에서만 증폭된 허상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때로 ‘남들이 하지 않는 일’보다는 ‘남들도 하는 일’을 선택하며 자신을 안전지대에 가둔다. 그러나 그 안전지대는 실제 울타리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벽일 때가 많다. 그 벽에 작은 균열을 내는 행위—이를테면 반바지 한 벌—만으로도 삶의 통풍이 달라진다.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지고, 마음엔 여유가 돈다.
혹시 올여름 반바지를 욕망하면서도 거울 앞에서 주저하고 있다면, 한 번쯤 과감히 꺼내 입어 보길 권한다. 날씨보다 뜨거운 시선도, 예의보다 긴 규범도 없다. 가벼운 천 한 장이 전하는 자유가,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던 겹겹의 껍질을 통쾌하게 벗겨 줄지 모른다.
송원서 (Ph.D.)
슈메이대학교 전임강사 / NKNGO Foru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