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카바레의 제왕, 한녹춘—패전 혼란기 오사카를 제패한 재일 거부의 일대기
13세 나이에 흥남에서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으로 건너간 한녹춘(韓綠春,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명 다나카 로쿠슌)은 정규 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 땅에서 거대한 부를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 최대 규모의 카바레 ‘후지카바레’를 운영하며 후지관광주식회사 회장 자리에 올랐고, 재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 오사카민단 고문 등을 역임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는 곧 재일동포사의 한 단면이자, 전후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 혼란기를 살아낸 조선인의 생존 전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녹춘의 출발은 불법과 합법이 뒤엉킨 격변의 현장이었다. 1940년대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 패전 직후, 그는 오사카에서 청년 무리들과 함께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이 시기 그는 폐허가 된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의 토지 시장에 주목했고, 무주지나 방치된 땅을 값싸게 사들이며 부동산 투자의 길로 나섰다. “25세 때였는데,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법도 질서도 사라졌다. 그런 혼란 속에서 좋은 땅이 거저 나오더라”는 그의 회고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런 땅 위에 그가 선택한 사업은 카바레였다.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큰 수익을 내던 업종이었다. 그러나 건축 자재는 부족했고, 사업 추진에는 조직의 힘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청년들을 규합해 ‘후지파’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필요에 따라 야쿠자의 방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공무원이나 기업과 거래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선택지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업의 성공 이후, 한녹춘은 조국의 요청에도 기꺼이 응답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는 수차례 국가를 위해 자금을 지원했다. 1971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요청으로 한국 경찰을 위해 사이드카 80대를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에서 사들여 보냈고, 육영수 여사가 추진하던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에 1억 엔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체육회 무교동 청사 건립 시에는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을 부담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같은 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한녹춘의 생애는 단순한 성공 신화 그 이상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이라는 적대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침없는 선택을 감행한 그의 삶은 재일동포 1세대의 치열한 생존사를 대변한다. 그는 자신을 ‘학교에 다니지 못한 촌놈’이라 불렀지만, 엘클라시코 토토사이트과 한국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굵직한 궤적을 남긴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