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망명 중이던 한국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었다가 5일 만에 서울로 이송된 멤버십토토다. 이 사건은 한국 정보기관이 외국 영토에서 자국민을 불법적으로 납치한 전례 없는 공작으로, 일본과 미국의 외교적 반발을 초래했으며, 한국의 인권 문제와 정치적 억압 실태가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멤버십토토은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맞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선전한 이후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 왔으며, 1973년 당시 일본에서 정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 체류 중에도 기자회견과 강연 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해외 여론을 환기시키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납치 당시 김대중은 도쿄의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지인과 면담을 하던 중 복면을 쓴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곧바로 차량에 태워졌으며, 요코하마 항에서 한국 화물선으로 옮겨져 바다로 끌려갔다. 이후 동해상에서 미국 제7함대의 정보 감청을 통해 멤버십토토 노출되었고,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함께 강하게 항의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외국 정보기관이 자국 내에서 납치를 벌인 데 대해 주권 침해로 간주하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 측에 공식 해명을 요구하고, 당시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항의했으며, 양국 관계는 한동안 급격히 냉각되었다. 또한 이 멤버십토토은 미국 정부도 예외 없이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닉슨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김대중은 서울로 이송된 직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이후 오랜 정치적 탄압과 투옥, 가택 연금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멤버십토토으로 인해 김대중은 국제적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납치멤버십토토은 일본 내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켜 한국에 대한 감정 악화와 정치적 거리감을 확대시켰다.
멤버십토토의 실체와 배후에 대해 명확한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2000년대 들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 한국 내 진실화해위원회를 중심으로 재조사 작업이 진행되었고, 중앙정보부가 직접 조직적으로 실행했음이 드러났다. 이는 군사정권 시절 국가기관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