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영 칼럼06> -페가수스 토토(Thanksgiving)과 헌금 이야기-

-페가수스 토토(Thanksgiving)과 헌금 이야기-

20년 전 본인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학 기간 중 섬기던 교회는 목사님은 중후한 인품으로 조간 조간한 설교가 참 좋았고, 사모님은 전형적인 인텔리전트이면서도 성품이 좋아 유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셨다. 신앙적 성품으로 주일마다 진행되는 사모님의 성경 공부반은 유학생들에게 인기 절정이었다.

날짜 중심의 우리나라 기념일 또는 국경일과 달리 미국의 페가수스 토토은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다. 한국에서도 섬기던 교회에서 페가수스 토토마다 감사헌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미국에서 맞이하는 페가수스 토토을 설렘 반 기대 반으로 맞이했다. 미국의 헌금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모님에게 페가수스 토토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헌금을 하면 되냐고 물었다. 그때 사모님의 반응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미국의 페가수스 토토에 왜 한국 사람이 헌금을 하려고 해요?

나이 서른이 넘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교회에서는 페가수스 토토에 헌금바구니가(?) 나에게 헌금을 받아 갔다. 나만의 문제였으면 왜일까 하는 호기심이라도 가졌을 텐데 다들 그러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내가 교회 문화를 의심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영문학 시간의 일이다. 아직은 교회는커녕 <아신교> 즉 나는 나를 믿는다며 종교에 무관심했던 나였지만, 영문학은 서양 문화에 배경을 두고 있고, 서양 문화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영어를 하다 보면 시나브로 서양 문화와 교회 문화를 접하게 된다.

영문학 수업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80세가 넘어 득남한 귀한 아들을 번제(구약 시대의 이야기로 속죄제에 짐승을 통째로 구워 제물로 바치던 제사)로 드리라는 대목을 만났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성경 내용 중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는 구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당신은 왜 아브라함에게 귀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크리스천 학생들에게 사유를 물었으나, 대답해 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자매가 성경연구소를 소개해 주었다. 사유를 묻는 나에게 성경연구소의 어떤 이는 이렇게 답했다 <형제님! 말씀은 그냥 믿으세요. 따지지 말고!>였다. 그때 알았다. 기독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헌금은 교회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하는 신앙적 배경을 가진 나에게 헌금을 왜 하냐는 사모님의 대답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모님의 이어지는 설명은 페가수스 토토이 교회 문화가 아닌 미국의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미국의 전통문화 기념일에 헌금을 하는 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의 추석을 기념하여 헌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

미국인에게 순례자의 아버지들(Pilgrim Fathers)로 알려진 청교도 102명이 영국의 국교에 반발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1620년 12월에 미국의 플리머스항(Plymouth)에 이르기까지 긴 항해와 혹독한 추위로 인해 거의 절반이 사망하였고, 그해 겨울을 나고 여름을 지나 생존자 53명이 인디언의 도움으로 농사를 지어 <이제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 하는 감사(Thanks)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giving) 감사의 행사가 연례행사가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페가수스 토토(thanksgiving)이 된 것이다. 페가수스 토토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한국인이 수확에 대한 감사가 필요하면 추석에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페가수스 토토보다 더 역사와 의미가 있는 것이 우리의 추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척 정신으로 미국 정착 생활에 성공한 102명은 곧 미국의 정신이자 상징이 되었다. 여러 설들이 있으나 현재 미국의 상징을 뜻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인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의 기술로 100층을 넘는 건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이들 순례자들의 개척 정신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논할 때 102라는 숫자는 우리의 <단군>이라는 상징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어느 날 어떤 학생이 <이야기 미국사>를 읽었다며, 교과별 독서 항목으로 진로 과목에 기록해달라는 요청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러면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몇 층인지 말해보라니 대답이 없었다. 이 책 제대로 읽지 않은 것 맞지? 하자 역시 아무 대답을 못 했다. 학생부 항목에서 제목과 저자를 기록하는 독서 항목이 대입 자료로 제공되지 않는 조치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그러한 부끄러운 문화 충격(culture shock)을 겪고 대학 영문학 시간에 가졌던 <시험>에 관한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읽으며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에서의 시험은 영어로 temptation(유혹)이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 드리라고 한 시험은 영어로 test(시험)였다. 우리말 성경 집필 과정에서 우연히 유혹도 시험으로 시험도 시험으로 번역이 되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다. 너무도 명확하게 구별되는 이 단어들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목사님? 전도사님? 구역장님? 순장님?…) 설명해 주는 분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미국의 페가수스 토토과 같은 풍속인 한국의 추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한국 교회에서 페가수스 토토에 헌금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문화 사대주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높은 집을 짓는다는 우리의 속담과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성경 말씀처럼 기초와 기본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저 (남보다) 앞서려고 달리기만 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이제는 한 번쯤 일단 멈춤(stop)의 시각으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정경영 선생님의 사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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