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경 토토사이트 슈어맨 30>토토사이트 슈어맨 반중 정서와 재외동포법 1

– 재외동포법의 배경 : 초기 이민사를 중심으로 –

지난 호에서는 반중국 혹은 반중국인 정서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살펴보았다. 애독자 중에는 반중 정서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을 주신 분들도 계신다. 글 쓴 보람을 주신 독자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이번 호에서는 재외동포법과 관련된 배경을, 다음 호에서는 재외동포법의 의의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반중 정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외동포법을 알아야 하고, 재외동포법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초기 이민사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해외 이민은 1902년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이민이다. 이어서 1905년의 멕시코로 건너간 계약 노동자들이 이민사의 문을 열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연해주와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생계형 이민과 일제 치하에 일본으로 끌려간 강제 노동자들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의 프론티어들이 미국의 이민사를 열었듯이, 하와이 이민은 인천 제물포항을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한 121명의 이민자들이 갤릭호를 타고 20여 일의 긴긴 항해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하면서 우리나라의 첫 이민사가 시작된다. 하와이 이민사의 키워드는 <사진신부>로 하와이의 한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여성이 사진만 주고받고 결혼하여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인 여성을 일컫는다. 사탕수수 농장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문화적 차이를 이겨낸 당시 이민자들의 삶과 개척정신은 한국의 프론티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3년 뒤 멕시코로 계약 노동자로 이민을 간 한인 노동자들 역시 애니깽이라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의 혹독한 노동으로 유명하다. 선인장과에 속하여 날카로운 가시에 억센 애니깽(멕시코 말로 에네켄이라고 한다) 농사환경은 거의 노예 생활에 가까운 고된 삶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멕시코의 한인 이민자를 일컫는 키워드는 애니깽이다. 하와이 노동자들과 함께 멕시코의 1세대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혹독함과 처절함의 싸움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또 다른 이민 사례는 연해주와 만주로의 생계형 이주라고 한다. 19세기 중후반부터 가난과 자연재해 및 관리들의 수탈 등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지자 농부들의 탈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수렵과 벌목 등으로 한국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의 삶으로 인해 한때는 연해주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한국인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패망하면서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 된 연해주의 한인들을 의심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1937년에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연해주의 한인들은 다시 한인 디아스포라의 신세가 되었다.

러시아의 연해주(당시에는 소련)와 함께 지리적으로 가까운 간도와 연변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는 한국의 흉년과 자연재해로부터 농민들의 탈출구가 되었다.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국을 세운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이 더해지면서 1940년대에는 만주의 한인 인구가 14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당시 140만 명이 넘는 한국의 도시는 경성(지금의 서울)밖에 없었다고 하니 만주의 한국인 수는 엄청난 숫자임에 틀림없다. 해방 이후 중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중국 내 한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칭하기에 이른다.

위에서 언급한 하와이와 연해주 그리고 만주는 처절한 이민사의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의 요람이기도 하다. 하와이의 경우 척박한 이민 생활에도 불구하고 외교 활동 및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부인구제회 같은 단체를 결성하여 독립기금을 모금 및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연해주는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피난처이자 주요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무장 투쟁은 물론 한글 학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으나,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한인 사회는 물론 독립운동 기반 또한 크게 타격을 입었다. 만주는 가장 큰 한인 사회와 함께 치열한 항일 투쟁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독립군 기지로써의 역할은 물론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양성 학교가 세워져 많은 독립군을 배출하기도 했다.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전투가 있었고,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 등이 이곳에서 활약했다.

재외동포법의 배경이 된 이들 지역에서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독립운동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음 호에는 재외동포법의 의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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